자존심이 강하지 않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내가 실제보다 낮게 평가 되어도, 그래서 손해를 보더라도, 굳이 불편할 일을 만들지 않으려는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자존심을 굽힐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즘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자존심이다.

내가 살면서 패배감을 느낀 적이 있던가?

나는 모두 이기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 적도 없는 삶을 살았다. 대체로 이루고자하는 바를 쉽게 이루며 살았다. 적당히 공부한 것 치고는 좋은 대학에 갔다. 호감을 얻고자 했던 대상에게 실패한 적 없다. 취업에 대한 서러움을 느낄 겨를도 없이 쉽게 입사했다. 늘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인정 받아 나이에 비해 일찍 감투를 썼다. 이 모든 과정이 늘 만족으로만 차있던 건 아니다. 나를 혐오할 정도로 후회하는 일들도 있다. 그러나 돌아봤을 때, 지금처럼 진한 패배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이제야 내게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은 바닥을 쳐 봐야, 진짜 자존심이 드러나는구나.

그 순탄했던 삶이 내게 심어놓은 것은, 내가 늘 보통 이상은 한다는 귀납적 결론이었는데 이게 얼마나 나를 좀먹고 있었는지 이제야 깨닫는다. 어줍잖은 자존심으로 변질되어 지금의 나를 이렇게 만든 가장 큰 공신이다. 패배를 겪어본 적이 없으니, 인정하고 내려놓을 줄을 몰랐다. 얼마 전에 사수에게 이를 물고 했던 말은 ‘패배자가 되고 싶지 않아요.’ 였다. 순전히 오기였다. 모두가 나를 패배자로 바라볼 순간이 가장 두려웠다. 그래서 내 역량 안에 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억지로 해내려고 그렇게 나를 혹사시키고, 결국 더 처참한 결과를 맞는다. 앓고 있는 우울증도 마찬가지다. 내 우울증 원인의 8할은 엄마이지만, 결국 이 또한 무너지지 않는 딸이고자 했던 내 자존심 아니던가.

내가 지금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록 공허하다. 나아질 수 있나? 정말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을 하루에 골백번을 한다. 그런데 왜 못내려놔? 역시 그것도 자존심 때문에. 난 앞으로 더 밟히고 더 뭉개지겠지. 왜? 그것도 또 자존심 때문에. 결국 멱살이 잡혀 질질 끌려가 억지로 눈이 벌려져 형편없는 나를 직접 마주 봐야 내려놓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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