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 만에 상담을 받으러 갔다. 2주 정도까진 괜찮았는데, 지난 한 주간 몹시 힘들었다. 힘든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일단 스스로의 감정을 믿기 힘든데에서 오는 혼란이 가장 컸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내 진짜 감정인지를 알 수가 없었는데, 내가 우울증 환자라는 것에 대한 자기 연민에 빠진게 아닌가 싶었다. 또한, 감각을 일깨우기 위해 외부 자극에 집중하는 훈련(이라고 생각했다.)이 싫었다. 어느 순간 ‘이게 지금 뭐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며 자신을 경멸하게 되더라. 내가 멍청이가 된 기분이었다. 화가 났고 귀찮았다. 하기 싫어서 지금은 하지 않는다. T는 내가 우울증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기 어려워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자존심 상해하고 창피해한다고. 그건 아마 지금까지 무결해야 했던, 든든해야했던, 늘 의지가 되어야 했던 내가 아닌 나를 받아들이기 어려워 하기 때문인 듯 하다고.

오늘 상담은, 3주만이었으므로 다녀온 여행에 대해서도 가볍게 대화하고, 위의 내용을 선생님께 쏟아내듯 말했다.

감각을 느껴도 안전하다고, 나를 달래주자.

감각에 대한 반응은 외부 자극에 대한 호기심이다. 그러나 이 호기심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본인이 안전하다고 판단 되었을 때에만 느낄 수 있다. 나는 어린 아이였을 때, ‘내가 안전하지 못 하다.’ 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감각을 느끼는 것에 저항했을 거라고 하셨다. 아이의 안전은 보호자로부터 보장받는다. 그러나 나를 계속 불안하게 했던 엄마 때문에 나는 그런 환경에서 자라지 못 했다. 내가 외부 자극에 반응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내 내면이 아직도 그게 안전하지 못하다고 판단해서라고 한다. 선생님은 나에게 ‘아이를 달래주듯’ 하라 하셨다. 집 밖은 위험하다고 생각되어 나오지 않는 아이를 억지로 끌고 나오게 되면 울고불고 난리가 난다고. 바깥은 안전하다고 계속 달래고, 기다려주라는 것이다. 오늘은 이만큼만. 오늘 하기 싫으면 내일. 이렇게 나 스스로를 달래며 해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것에 짜증을 내고 화를 내도 괜찮다고. 내가 감정을 믿지 못 하는 것은 아마 두 가지 중 하나일 거라고 하셨다. 감정을 느끼는 것이 고통스러워 하지 않았거나 (안전에 대한 본능적 방어) 감정이 진심으로 받아들여진 적이 없어서일 거라고.

어린 아이에게 보호자의 일관성은 중요하다. 아이는 배가 고프면 운다. 울면 엄마가 젖을 물린다. 그 행위에서 엄마라는 대상에게 신뢰와 안정을 느낀다. 그러나 어느날은 울어도 엄마가 오지 않는다. 올 때도 있고 오지 않을 때도 있다. 이 일관적이지 못한 태도는 아이에게 혼란을 줌과 동시에 엄마에 대한 신뢰를 잃게 한다.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의 파탄으로까지 이어진다. ‘나는 엄마가 돌봐줄만한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야.’ 라고. 나도 그랬을 것이다. 어린 아이에게 보호자는 자신의 감정보다 아이의 감정에 맞춰주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 엄마는 본인의 감정에 더 충실한 사람이었다. 어느날은 나와 계셨고, 어느날은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여기에서 내가 느끼게 되었을 존재감의 상실. 감각을 느끼보라는 건,  결국 스스로에게 집중하라는 의미인데 ‘멍청이 같다’ ‘한심하다’ 싫다’ 라고 표현하는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여기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지.

 어린아이였던 적이 없는 소희씨에게, 이제 스스로의 엄마가 되어주세요.

어린 아이는 이기적이다. 그리고 그 시기에는 이기적이어도 된다. 모든 것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도 된다. 나에겐 그런 어린 시절이 없었던 셈이다. 힘들 때 가족에게 이야기 하지 않는다. 힘들다 말하는 것은 결국 위로받고 싶다는 의미인데, 나는 가족에게 위로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힘들었을 거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자조하며 반문했다. 근데 저 사실 살면서 그렇게 힘들다고 생각한 적 없는데요. 힘들면 안 되니까 힘들다고 느끼지 않으려 했겠죠. ‘힘들었겠구나. 고생했구나.’ 엄마로부터 이런 위로를 받아야 했는데.

“선생님, 그럼 저는 지금이라도 엄마에게 위로를 받으면 괜찮아질까요?”
“아니요. 소희씨 어머니는 소희씨를 위로할 수 없어요.”

그리고 내 안에서 자라지 못 한 어린아이를 성장시켜주어야 한다. 어떻게 성장시킬까. 아이는 원하는 것을 보호자로부터 받으며 성장한다. 그런 경험이 있어야만 성인이 되어도 스스로를 돌볼 수 있다. 어린 시절 엄마로부터 돌봐지지 않았던 내가 지금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한다. 그러니 이제 나의 엄마가 되어주라 하셨다. 배가 고프지? 밥을 차렸으니 먹으렴. 밖에서 어디 다친 곳은 없니? 어디 아픈곳은 없는지 병원을 가보자. 새옷을 입어야겠구나. 지내는 방을 청결하게 유지시켜줘야겠구나. 밖에서 힘든 일은 없었니? 많이 힘들었겠다. 고생했구나……. (선생님이 이렇게 엄마처럼 말씀을 계속 하셨는데 조금 눈물이 날 뻔했다.)

그리고 난 우울증 같은 거 걸리는 나약한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 상담 받으러 오는 가장들이 주로 하는 말이라고 한다. 더 이상 나는 가장이 아니고, 나를 위해 사는 사람이라고 지금부터의 사실과 나에게만 주목하라고 당부하셨다.

“선생님, 저는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지금도 멋져요. 대견해요. 애썼어요. 많이 힘들었을텐데 잘 해왔어요.”

눈물을 참았다. 다음 상담에서는 만약 어린 아이가 된다면 무엇을 하고 싶을지, 어떨지, 이런 것들을 이야기 해보기로 했다. 상담이 연기 되면서 정서적으로 많이 힘들었는데 오늘 상담으로 어느 정도는 정돈되고 가다듬어진 느낌이다. 다행이었다. 그리고 내가 나아지는데에는, 오래 걸릴 거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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