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상담은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에서부터 시작했다. 엄마로부터 보호와 안정, 즉 돌봄 받아야 하던 나는 그러지 못 하고 자랐으므로, 누군가로부터 돌봄 받아 본 적이 있는지를 생각해보라고 하셨다.

곰곰히 생각하다가 나는 ‘남자친구’라고 대답한다.

나는 성인이 된 이후로 지난 1년을 제외하고 거의 쉬지 않고 연애를 해 왔다. 즉 연애를 이렇게 길게 하지 않고 있는 시기는 지금이 처음이다. 매일매일 연애 휴식 최장기록을 갱신하고 있는 셈인데, 생각해보니 나에게 남자친구는 늘 의지가 되는 존재였다. 내가 투정을 부려도 되고 어리광 부려도 되는 유일한 대상. 그래서 나의 남자친구는 늘 나보다 나이가 많은, 나보다 어른스러운, 나를 이끌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함께 있으면 나를 돌보아주는 사람. 그래서인지 나는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이성에 대해 늘 ‘어른스러운 사람’ 이라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어른스러운 사람’을 정의해 보라고 했다. 이에 대해 나는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외부의 자극에 쉽게 동요하지 않고 여유롭게 대응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반면, 가장 마지막으로 만났던 A과 어떻게 헤어졌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A는 나와 나이차이가 제법 났고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어른스러운 남자였다. 내가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모든 걸 해줄 것 같았던 사람. 그러나 나는 A에게 실망하여 이별을 고했었는데, 그 이유는 A에게서 발견한 ‘소심한’ 구석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소심한 사람을 심하게 못 견뎌 한다. 특히 남자에게서 그런 모습을 발견할 때 더 크게 실망하는 편이다. 소심하게 삐쳐서 꽁해있는 모습을 나는 잘 받아주지 않는 편인데 어느 순간부터 A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헤어지고 말았다.

“소심한 사람이 싫어요?”
“네, 싫어요. 그런 사람과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소희씨 주변에서 가장 소심한 사람이 누구죠?”
“엄마요.”
“이상형으로 외부 자극에도 동요하지 않는 든든한 사람을 말했어요, 소희씨 주변에서 외부 자극에 감정적으로 가장 많이 흔들리는 사람은 누구죠?”
“……엄마요.”

어릴 때부터 나를 불안하게 했던 엄마의 기질에 대한 혐오는 나의 이성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나는 엄마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엄마와 반대 성향을 가진 사람에 호감을 느껴왔다. 그리고 엄마로부터 돌봄 받지 못했던 결핍을 연애를 통해 해소하고 있었다. 아빠는 나에게 든든하고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지만 아빠와는 거의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나는 주변에 의지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 내가 가장 의지하는 사람은 누구냐는 말에도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 했다. 모든 것을 솔직하게 시시콜콜한 것까지도 털어놓는 친구들이 있긴 하지만, 내가 정말 그들에게 ‘의지’하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의지하는게 뭐지?’ 라는 혼란까지 들 정도였다. 어쩌면 성인이 된 이후로 꾸준히 연애를 해오던 내가, 연애가 끊긴 작년을 기점으로 무기력이 더 심해진 것은 나를 돌보아주는,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보호 받고 돌봄 받아야 하는 아이가 그렇지 못하게 되면 감정을 잃는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고아원의 아이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아이들은 감정이 풍부하여 생동감이 넘치지만 돌보아지지 않는 아이들은 점점 눈빛이 멍해진다고.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고통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에. 그리고 나 역시 자라면서 감정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남들보다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나에 대해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냐고 물으셨지만, 나는 그저 내가 성격이 무던해서라고 생각해왔다. 이상하다기보다는 남들보다 조금 둔하고 무덤덤하게 자라왔다고.

감정을 잃어버린 사람이 느끼게 되는 것은 결국 ‘귀찮음’ ‘무기력’뿐이라고 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누군가가 나에게 본인의 이야기를 할 때에 머리로는 그 감정을 이해하지만 내가 정녕 가슴 깊이 공감하는가에 대해서 스스로 의문을 던진 적이 여러번 된다. 나는 누군가의 감정을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인가? 늘 스치듯 지나치거나 한걸음 더 다가가지 못하는 것 아니었나? 이게 나의 문제인지, 아니면 보통의 사람이 느끼는 공감력이 원래 이 정도인지 가늠하지 못 했다. 오늘에서야 알 수 있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공감해주기엔 이미 감정을 못 느끼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딱히 재미있는 것도 없고, 딱히 싫은 것도 없고 다 고만고만. 심드렁하고 시큰둥한 상태.

“선생님, 그래서 전 어떻게 해요? 감정이 없는데?”
“감정을 열기 위해서는 먼저 감각부터 열어야 해요.”

오늘 상담에 앞서 좋아하는 음식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었는데, 나는 미각이 둔하다고. 딱히 막 좋아하는 것도 없고 싫어하는 것도 없고 웬만하면 다 맛있다고 느낀다고 대답했었다. 자신의 감정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일단 감각부터 되살려야 한다는 것이 선생님 의견이었다. 사실 나는 미각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외부 자극에 둔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인데, 이것은 내가 무딘 사람이라기 보다는 자극에 반응하기 싫어하는 내 의지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꾸 둘러보며 눈에 자극을 주고 냄새를 맡아 보고 안 듣던 소리도 들어보려 노력하고 맛을 볼 때에 무슨 맛인지 어떻게 다른지도 생각해보고 손을 뻗어 바람이라도 느껴보라는 조언을 해 주셨다.

다음 시간부터는 감정을 느끼는 것이 왜 고통스러워 피하게 됐는가를 찾아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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