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그만 두기로 했다.

1년 4개월 동안 다녔던 지금 직장에 대해 회고해 보자. 처음 이직을 할 때만 해도 나는 꽤 기대에 부풀었었다. 부산이라는 새로운 환경이 큰 자극이 될 거라고 믿었다. 회사의 분위기는 이 규모의, 이 역사의 회사다웠다. 업무 또한 기대됐다. 나는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못 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러나 어디서부터 망가졌는지 잘 모르겠다. 회사가 요구하는 인재상은 나와 맞지 않다. 나는 이 자유분방함을 흉내내는 엄격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일과 동료들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너무 많은 배반을 허무하고도 쉽게 겪었다. 내가 해야 하는 일 또한 너무 많았다. 업무량이 많은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업무량이 많은 건 괜찮다, 다만 그게 내가 커버할 수 있는 영역인가의 문제다. 나는 이곳에서 무려 4개의 롤을 수행해야했다. 내가 이 곳을 선택하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 했던 일이다. 결론은 못 할 일이었다. 적성에 맞지 않는다. 이 못 할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 내가 감당 못한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계속 붙들고 늘어졌지만, 이제는 마음을 비우려 한다. 모든 것에 완벽할 수는 없다. 어제와 오늘 직장동료 J와 많은 이야기를 했다. 나 역시 회사에 대한 신뢰가 없고, 회사 또한 나에게 신뢰가 없음을 알고 있다. 여러 번 노력하자는 다짐이 있었으나 더 이상은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나에게 남아있는 건 뭘까. 퇴사 시점은 아마 5월 말이 될 것이다. 벌려놓은 것이 있으니 최소한의 수습은 해야 할 것이고, 적어도 매니저였으니 공백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도의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5월 말 쯤이면 적당할 것이다.

그래서 6월부터 나는 뭘 하지. 사실 곧바로 이직을 할 수도 있다. 이직을 하려고 마음 먹으면 갈만한 곳들이 있다. 물론 나를 받아줄 지는 모르겠지만, 낙관적인 편이다. 그러나 이 상태로 이직을 하는 게 맞는가? 에 대한 생각은 든다. 경력은 쌓아왔다 하더라도, 자기 개발을 하지 못한 지 너무 오래 되었다는 데에서 오는 불안이 있다. 이직한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 그만 두면, 그 다음에는? 선택지가 점점 좁아질 것이다.

그래서 영어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어학원을 다니는 것도 고려했지만, 휴식 겸 6개월 정도 어학연수를 다녀오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나이가 나이인지라(…) 워킹홀리데이는 갈 수 없다. 1순위로 영국을 생각하고 하루 동안 서치해보았다. 하도 돈을 흥청망청 써서 목돈 들고 있는 것이 없다보니 좀 아쉽다. 이런 급작스러운 사태를 대비해서 사람이 돈을 모아야 하는 거구나. (이제야 깨달음) 대략 알아보다가 두 군데 정도로 후보지를 좁혔다. 영국 브리스톨과 호주 시드니이다.

일단, 브리스톨의 경우 어학연수를 영국에서 하고 싶고, 런던은 피하고 싶은 나의 기준에 부합한다. 런던과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에 다녀오기도 쉽다. 리버풀도 고려했지만 런던과 멀고, 액센트가 너무 강하다는 점에서 제외하게 되었다. 유학원을 통해 받아 본 추천 어학원 중에서 마음에 드는 곳은 브리스톨 대학교와 연계되어 있다. 브리스톨 자체 물가도 그리 비싸지 않은 편이고 홈스테이 만족도도 높다는 점이 괜찮다. 나를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훌쩍 떠나 유럽에서 지낼 수 있다는 건 꽤 매력적이다. 다른 유럽 국가로 여행도 쉽고. 그러나 영국에서는 학생 비자로 일을 할 수는 없다.

시드니의 경우 친구 T가 살고 있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 모두 내가 시드니에서 어학 연수를 하는 동안 그들의 집에서 홈스테이 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이다. 특히 T는 내가 시드니로 가길 바라는 눈치이다. 시드니에서 갈만한 어학원은 영어권 국가에 센터가 많은 제법 유명한 곳으로 나쁘지 않다. 시드니에서는 친구의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고, 학생비자를 가지고 아르바이트도 가능하기 때문에 브리스톨과 비교했을 때 경제적인 면에서 월등한 장점이다. 그러나 내가 실제 아르바이트를 할 지는 의문이고(…) 한국인 친구 집에서 지내다 보면 공부 능률이 떨어지진 않을까 걱정되는 면이 있다. 내 하기 나름이지만.

장단점이 분명하기 때문에 어느 곳을 선택할지에 대해서는 당분간 긴 시간을 두고 고민이 필요할 듯 하다. 부산을 떠나게 되면 일단 본가로 들어갈 생각이다. 어학연수 가기 전까지 3개월 정도는 쉬면서 공부도 하려고. 어학연수를 다녀온 후에 직장을 다시 구하고, 그때 자취를 또 하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동생과 함께 살고 싶다는 마음이 있는데다, 판교에서 일하게 되면 통근하기에 무리가 있는 건 아니다. 어차피 본가는 동생 혼자 살고 있으니 처분하고 동생과 적당한 곳에서 함께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이런 저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하다. 고달팠던 회사를 그만둔다고 해서 무조건 속이 시원하진 않다. 팀원들에 대한 애정과 필요 이상의 책임감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 못 하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그래봐야 우리는 같이 일하는 동료들로 만났을 뿐이고 대단한 시절을 함께 보낸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이런 이별에 덤덤할 때도 되었는데 역시나 아쉬움과 후회 때문인지 회사에서는 특히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나라 할지라도 이따금씩 멍한 얼굴을 하게 된다. 게다가 부산을 막상 떠난다고 하니 그 또한 미련이 남는다. 부산은 그래도 좋은 곳이었다. 계속 이곳에서 살 생각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2년 정도는 머무를 예정이었는데…….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처분과 이사도 쉬운 일이 아닐 거고.

복잡하다.

요즘 작년 업무 평가와 연봉 협상 기간이라 나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듣게 된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듣는게 이렇게 힘든 날도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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