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뚝거리며 선생님을 뵙자, 아직도 다 낫지 않은거냐며 걱정하신다. 구구절절히 왜 아직 이모양인지를 설명했다. 엄마에게는 연락 해 보았냐고 하셨는데, 아빠에겐 말씀드렸지만 엄마에겐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유를 물으시길래, 지나치게 걱정하시는게 불편하다고 했다. 엄마가 자식을 걱정하는 것이 왜 불편하냐고 물으셨는다.

“너무……. 지나쳐요. 걱정을 해 주시는 건 좋은데 그게 너무 안좋은 방향으로 흘러요. 엄마가 쓸데 없는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고, 사태의 원인을 이상한 곳에서 찾으면서 결국 저한테 짜증을 내고, 그럼 저도 짜증을 내게 되고……”

유년 시절에도 이렇게 다친 경험이 있었는지에 대해 물으셨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한 번 발목을 다쳐서 지금처럼 깁스를 했던 적이 있다. 그 외에는 대학생 때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했던 적이 있고. 그때에 어떠했는지에 대해 선생님이 상세히 경험을 물으셨다. 사실 그때의 사고들로 인해 엄마와의 마찰에 대해서는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 없다. 내가 엄마의 걱정을 경계하는 것은 특정 사건때문이 아니라 내 성장 기간 내내 있어왔던 일이다. 엄마는 예민한 사람이고 이미 발생한 사건의 안타까움을 쉽게 덮지 못한다.

“그러게 왜 그랬어. 이게 다 뭐뭐뭐 때문이야. 네가 뭐뭐뭐 해서 그래. “

나는 그게 너무 답답하고 싫었다. 이미 벌어진 일의 원인을 탓해서 뭐 해. 심지어 엄마가 지목하고 쓸데없이 집착하는 그 원인은 나로서는 납득 되지 않는 말도 안되는 것들 뿐이었다. 예시를 들자면, 내가 야근하고 택시를 타고 집에 오다가 사고가 났다. 잘못은 사고 가해자에게 있다. 그러나 엄마의 피해망상은 사고의 가해자로 야근을 시킨 회사, 그런 회사를 다니는 나로 이어지고 심할 경우 나를 그렇게 만든 엄마로까지 지목되어 당신에 대한 자학이 시작된다. (예시이지만 있을법한, 내가 숱하게 겪었을 예시다.) 그 자학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나에게 짜증을 낸다. 아프거나 다친 나를 돌보는 것에 있어서는 부족함이 없었냐고 선생님이 물으셨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과하면 과했지 부족함은 없었다. 즉, 몸은 편하지만 정신은 너무 피로해지는 돌봄.

아파진 사람은 퇴행의 상태다. 마치 어린아이가 되어 돌봄을 받는 과정에서, 관심을 받고 그로 인한 애정을 느낀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을 비롯해 어떤 사람들은 애정을 느끼고자 일부러 아파지기도 한다고 했다. 그렇게 누군가를 찾고 싶을 때가 언제냐고 하셨다. 잘 모르겠어서 맛있는 거 먹고 싶은데 혼자 못 먹을 경우라고 대답했다. 힘들 때 누군가를 찾고 싶지는 않냐고 물으셨다.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 힘들다고 누군가를 찾고 싶은 때는 잘 없는 것 같다. 가끔 친한 사람들과 만나 내 처지에 대해 하소연 하고 홀가분함을 느끼기도 할 수는 있는데, 그저 기분 상 우울하고 힘들 때 내가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적은 없는 것이다. 그냥 집에가서 자고 싶다는 생각만 하지. 아니면 그냥 일기를 쓴다든가 오는 사람 없는 블로그에 쓴다든가.

“누구한테 나 우울해 어쩌고 저쩌고 그런 얘기 하기 싫어요, 선생님. 어차피 그 사람도 저한테 해줄 수 있는게 없는데 뭔갈 해줘야 할 것 같은 부담만 주잖아요. 폐끼치는 것 같아서 미안해요. 저를 상대해 줘야 하는 사람의 노고가 미안해요. 그리고 저조차 누가 우울하다고 징징거리는 거 보기 싫거든요. SNS 보면요. 사람들더러 봐 달라고 자기 우울함을 전시하는 사람들 되게 많거든요? 저는 그런 사람들 너무 같잖아요. 무슨 말인지 이해도 안되는 말들 잔뜩 써놓고 우울하대요. 뭐 어쩌라는 거야. 우습고 싫어요. 어차피 다른 사람은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는데요. 그냥 관심 구걸이잖아요. ”

왜 이렇게 우울을 혐오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 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내 성장 과정에서 나에게는 심각한 우울을 겪고 있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 있었다. 엄마의 우울을 목격하면서, 나는 엄마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갖고도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었다. 엄마는 문을 닫고 내 도움을 거부했고 나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우리 엄마는 왜 저렇게 맨날 우울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것도 없는데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만약에 엄마가 우울 할 때, 문을 열고 나를 받아주고 내 말과 행동에 웃어주었더라면 달라졌을것 같냐고 물으셨다. 그랬을 것 같다. 그러면 나는 엄마가 우울해 보일 때마다 엄마를 웃게 해주기 위해 같은 일을 반복했겠지. 선생님은 그것도 사실 나에게 좋은 일은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늘 누군가의 우울을 목격하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의 무기력이 지금의 내 우울 혐오를 만들었을 거라고 하셨다. 반대로 내가 우울할 때에 엄마는 어떻게 하셨는지를 선생님이 물어보셨는데, 엄마는 내가 우울한 걸 모른다고 하셨다. 나는 엄마에게 우울함을 내색한 적이 없다. 기분이 안 좋아보이거나 처져있을 때엔 엄마가 알아볼 수도 있지 않냐고 하셨는데, 그럴 땐 그냥 별일 없다고 해왔다.

나는 나의 우울도 같잖게 여긴다. 나의 우울을 혐오하고 우울해져 있는 내 상태에 대해 자존심 상해하며, 우울해 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 한다. 선생님은 나의 우울과 엄마의 우울은 차원이 다르다고 하셨다. 엄마의 우울은 당신 삶이 만족스럽지 못해 발생한 우울이지만, 나의 우울은 어린 시절부터 그런 엄마로부터 영향을 받아 내 기질 자체가 되어버린 우울이다.

“선생님, 저는 제가 우울한지 몰랐어요. 근데 우울하다는 걸 알게 되니까, 그리고 왜 우울한지 그게 무슨 강박에서 나온건지 알게 되니까 너무 괴로워요. 나아지지 못하는게 너무 고통스러워요.”

오늘의 상담으로 벌써 한 사이클을 다 돌았다. 나는 앞으로도 꾸준히 상담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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